빨대는 왜 구부렸다 펴면 하얗게 변할까? 플라스틱 백화의 정체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플라스틱을 반복해서 구부리면 왜 접힌 부분이 하얗게 변할까요? 고분자 내부의 미세공극과 크레이징, 빛의 산란으로 이어지는 플라스틱 백화 현상을 알아봅니다.
플라스틱 빨대나 얇은 플라스틱 뚜껑을 손가락으로 강하게 구부렸다 다시 펴본 적이 있다면 재미있는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래 반투명했던 재료인데 딱 접었던 부분만 우윳빛처럼 하얗게 변합니다.
처음에는 표면에 흠집이 생겨서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닦아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색소가 새로 생긴 것도 아닌데 플라스틱은 왜 갑자기 흰색으로 보이는 걸까요?
답은 색이 아니라 빛이 지나가는 길의 변화에 있습니다.
플라스틱이 하얘진 것은 흰색 물질이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플라스틱을 잡아당기거나 구부리면 고분자 내부에는 응력이 발생합니다.
응력은 단순하게 말하면 재료 내부가 외부 힘을 견디면서 받는 힘의 정도입니다.
기본적인 인장 상황에서는
응력 σ = 힘 F / 단면적 A
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플라스틱에 힘을 계속 가하면 처음과 똑같은 내부구조를 유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특정 고분자에서는 미세한 공극(void)이 생기거나 크레이즈(craze)라고 불리는 미세구조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크레이즈를 단순한 균열과 동일하게 보면 안 됩니다.
크레이즈 내부에는 빈 공간뿐 아니라 하중을 전달하는 가느다란 고분자 섬유 구조인 피브릴(fibril)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갈라진 균열과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흰색으로 보일까요?
빛 때문입니다.
처음 플라스틱 내부가 비교적 균질할 때는 빛이 통과하는 과정에서 산란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형으로 내부에 수많은 미세공극과 서로 다른 굴절률을 가진 경계면이 만들어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고분자 ↔ 미세공극
사이의 굴절률 차이 때문에 빛이 여러 방향으로 산란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직접 통과해 들어오던 빛의 비율은 감소하고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는 빛이 증가합니다.
그 결과 해당 부위가 불투명하고 하얗게 보이는 백화(stress whitening)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새로운 흰색 색소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재료 내부의 미세구조가 변하면서 빛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얗게 변했어도 다시 쓰면 괜찮다는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여기에서 생활 속에서 중요한 부분이 나옵니다.
플라스틱 제품의 접힌 부분이 하얗게 변했을 때
“색만 변했을 뿐이니까 강도에는 문제가 없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백화는 그 부위에서 상당한 소성변형이나 미세구조 변화가 발생했다는 신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료에 힘을 가했다가 제거했을 때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는 변형을 탄성변형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힘을 제거한 후에도 변형이 남으면 소성변형이 일어난 것입니다.
플라스틱을 반복해서 접으면 특정 위치에 변형이 집중됩니다.
굽힘 → 국부 응력 집중 → 미세구조 변화 → 다시 굽힘 → 손상 누적
과정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실제 균열이 성장하면서 파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플라스틱 뚜껑의 얇은 연결부를 계속 접었다 폈을 때 처음에는 하얗게 되고, 나중에는 끊어지는 것도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재미있는 질문이 생깁니다.
왜 어떤 플라스틱은 잘 휘고 어떤 것은 조금만 구부려도 깨질까요?
플라스틱이라고 모두 같은 재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분자 사슬의 구조, 결정화도, 분자량, 첨가제, 온도 등이 기계적 거동을 결정합니다.
특히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유리전이온도(Tg)입니다.
고분자의 비결정 영역은 온도에 따라 사슬의 움직임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리전이온도보다 충분히 낮은 영역에서는 분자사슬의 운동성이 제한되어 재료가 상대적으로 딱딱하고 취성적인 거동을 보이기 쉽습니다.
반대로 사슬 운동성이 충분한 조건에서는 변형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플라스틱 제품의 파손을 Tg 하나로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결정구조와 가공 방향, 변형 속도, 첨가제 등도 함께 영향을 줍니다.
이 때문에
“플라스틱은 추우면 무조건 깨진다.”
보다
“온도가 내려가면 일부 고분자에서 사슬 운동성이 감소해 충격과 변형에 대한 거동이 달라질 수 있다.”
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백화 현상을 직접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 백화는 생활 속에서 관찰하기 좋은 재료과학 실험이기도 합니다.
같은 종류의 얇은 플라스틱 조각을 준비하고 각각
0회 / 5회 / 10회 / 20회
처럼 같은 위치를 반복해서 구부려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가능하면 같은 재료, 같은 굽힘 위치, 비슷한 각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검은색 종이 위에 올려놓고 같은 조명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반복 횟수가 증가할수록 접힌 부위의 밝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발전시키면 스마트폰 사진의 같은 영역에서 픽셀의 평균 밝기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백화 정도를 수치화하는 간이 실험도 가능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사진의 밝기 변화만으로 실제 크랙의 크기나 재료의 잔존강도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측정하려면 현미경 관찰이나 인장시험 같은 별도의 분석이 필요합니다.
이 구분이 중요합니다.
관찰할 수 있는 것과 그 관찰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플라스틱의 하얀 접힘 자국은 사소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크기의 구조 변화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힘 → 고분자 구조 변화 → 미세공극·크레이징 → 빛 산란 증가 → 백화 → 반복 변형 시 손상 누적
이라는 연결고리입니다.
결국 플라스틱이 하얗게 된 것은 단순히 색이 바랜 것이 아닙니다.
재료가 우리에게 보내는 일종의 ‘변형의 흔적’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재료공학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재료의 내부구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빛이 그 구조의 변화를 우리 눈앞에 드러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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